여백
HOME Nobel Prize Nobel Prize Story
인류의 최대 과학 공헌자 - 마리 퀴리글 : 김현숙 한국노벨과학문화원 부원장

퀴리 부인의 노벨상 가족과 위대한 업적

 

마리 퀴리(퀴리 부인)는 폴란드 태생의 프랑스 물리학자⦁화학자로, 라듐 및 폴로늄의 발견자이다. 1903년, 라듐 연구로 마리는 남편 피에르와 공동으로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고, 1907년에는 라듐 원자량의 정밀한 측정에 성공하였으며, 1910년에는 금석 라듐의 분리에 관한 업적을 이루었다. 이듬해에는 라듐 및 폴로늄의 발견과 라듐의 성질 및 그 화합물 연구의 공로로 마리가 노벨화학상을 수상함으로써 세계 최초의 노벨상 2회 수상자가 되었다. 결국 이 위대한 여성과학자에게 노벨상의 영광과 죽음을 안겨준 방사능 단위에 퀴리라는 이름이 사용되었고, 화학원소 퀴륨에는 이름이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1935년에는 중성자 발견의 실마리가 된 중요한 현상과 인공방사능 현상의 발견에 대한 업적으로 마리의 장녀 이렌 부부가 공동으로 노벨화학상을 수상했다. 1965년에는 차녀 이브의 남편 헨리 라부이스 퀴리가 유니세프 대표로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으며, 이브는 2005년 유니세프 활동의 공로로 프랑스의 가장 영예로운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 받았다. 퀴리 부인으로도 유명한 마리 퀴리와 그녀의 가족들은 인류의 건강과 복지에 지대한 기여를 함으로써 인류 역사상 그녀와 그녀 가족들의 위대한 업적들이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다.

퀴리 부인의 청년기

마리 퀴리(Marie Curie, 1867~1934)는 러시아 제국 치하에 있던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서 1867년 11월 7일에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청년기까지 고향에서는 마리 스클로도프스카(Marja Sklo-dowska)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다.
마리의 아버지 브와디스와프 스크워프도프스키는 수학과 물리를 가르치는 중학교의 교사와 장학사를 역임했으며, 어머니 브로니스와바 역시 교육자로서 중학교 교장을 지낸 교육자 집안에서 마리는 반듯한 성격으로 성장했다. 마리의 형제는 큰 언니 조피아(1862년생), 오빠 유제프(1863년생), 둘째 언니 브로니스와바(1865년생), 셋째 언니 헬레나(1866년생)가 있으며, 마리는 1남 4녀 중의 막내였다. 마리가 11세 되던 해에 폐결핵을 않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아버지가 실직하였으며, 큰 언니 조피아가 요절하는 등으로 가정사가 평탄치 못하고 생활이 어려운 고난 속에서 어린 시절
왼쪽부터 마리, 아버지, 브로니을 보냈으나, 마리는 1883년(16세)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 스와바, 헬레나의 모습ⓒWikipedia의 중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한 재원이었다. 17세 무렵, 그 당시 여자들의 대학교육이 허용되지 않았던 폴란드를 뒤로 하고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으나, 가정형편으로 인해 시골 부유한 농가에서 그 집의 자녀들을 가르치는 가정교사를 하면서 독학으로 공부를 하였다. 그 사이 아버지가 소년감화원 사감으로 취업이 되어 경제적으로 다소 여유가 생기게 되자, 둘째 언니 브로니스와바 부부가 의사로 일하던 프랑스 파리에서 학업을 계속하게 되었다. 24세 되던 1891년 마리는 파리의 소르본 대학에 입학하여 수학과 물리학을 전공하였고, 그 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을 했다.

퀴리 부인의 연구생활과 라듐발견
마리 퀴리는 소르본 대학교에서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수학과의 졸업시험을 준비하던 시기에 파리 물리화학학교의 실험주임으로 근무 중이던 피에르 퀴리(Pierre Curie, 1859년~1906년)를 만나 사랑을 하게 되었다. 그 후 28세 되던 해(1895년)에 결혼을 하게 되어 마리 스클로도프스카 퀴리가 되었고, 프랑스식으로 마리 퀴리(Marie Curie)부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마리는 30세 되던 해(1897년) 9월에 맏딸 이렌

연구실에서 피에르 퀴리와 마리퀴리

(Irene)을 낳았고, 아이를 기르면서 연구 생활을 계속했다. 같은 해 연말 마리는 박사학위 논문의 테마로 베크렐선에 대한 해명을 택했고, 남편 피에르가 발명한 퀴리 전위계(電位計)로 공기를 이온화하여 전기전도성(電氣傳導性)을 부여하는 베크렐선의 성질을 이용, 베크렐선의 세기를 정량적으로 측정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우라늄 화합물에서 나오는 베크렐선의 세기는 우라늄 원소의 함량에 비례하고, 우라늄의 물리⦁화학적 상태와는 관계가 없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래서 피에르와 마리의 업적은 점차 학계에서 인정을 받게 되었다. 32세 되던 해(1900년)에 피에르는 파리대학 의과대학의 예과 준비교실에서 물리학 강의를 하게 되었고, 마리도 세부르여자고등사범학교에서 학생들을 지도하게 되어 퀴리 부부는 학생지도와 연구생활을 병행할 수 있게 되었다.

세계 최초로 노벨과학상을 두 번 수상한 퀴리 부인
마리 퀴리는 가정을 꾸려가면서 남편 피에르 퀴리와 함께 공동연구 작업에도 충실했는데, 1903년 방사능에 관한 탁월한 연구 성과를 인정받아 퀴리 부부와 앙리 베크렐(Antoine Henri Becquerel, 1852∼1908)의 3인이 노벨물리학상을 공동으로 수상했다. 1904년에 피에르는 파리대학의 교수가 되었으며, 그 해 12월 막내딸 이브가 태어나게 되어 마리와 피에르는 예쁜 두 딸을 둔 다복한 가정을 꾸리게 되었다. 마리는 1905년, 프랑스아카데미 회원으로 선발되는 영광을 안게 되어 매사가 행복의 연속처럼 보였으나, 이듬해 4월 19일 안타깝게도 남편 피에르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 엄청난 재앙으로 마리는 슬픔과 절망 속에서 방황하였으나, 어린 두 딸과 연로한 시부를 위해 마음을 다잡고 다시 연구에 몰두했다. 1906년 11월 5일, 마리는 남편의 뒤를 이어 파리대학에서 첫 강의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당시 프랑스의 대학에서 부인이 교단에 선 최초의 사례가 되었고, 이는 소르본대학에서 강의를 한 최초의 여성교수가 되었다. 이즈음 노르웨이의 아카데미는 마리가 그 동안 일궈낸 탁월한 연구 성과에 크게 주목했다. 화학 원소인 라듐과 폴로늄을 발견하고, 라듐의 성질을 결정하고, 라듐을 순수한 금속상태로 분리하는 등 원소들의 화합물에 관한 탁월한 연구결과를 통해 인류와 화학발전에 크게 기여했다는 공로가 인정되어 44세 되던 해(1911년), 마리에게 노벨화학상이 주어지게 되었다. 마리 퀴리는 세계 최초로 두 번의 노벨과학상(물리학상, 화학상)을 수상한 위대한 여성과학자로서 후세에 그 이름을 길이 남기게 되었다.
마리 퀴리는 남편 피에르가 생존 당시에 그토록 소망했던 훌륭한 연구소를 갖게 되었고 (1914년), 그 연구소의 책임자인 연구소장이 되었

다. 그 당시부터 이 연구소의 거리는 피에르 퀴리라는 이름이 붙여졌으며, 마리는 이 연구소에서 많은 후진 학자들을 양성하면서 연구에 전념하였다. 그 뒤 몇 년 후,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마리는 방사선 치료차를 준비하고 이 도구를 이용하여 부상병들을 치료하기도 했다. 
1921년에는 미국에 초청되어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으며, 미 대통령 하딩(W.G. Harding)이 마리에게 1g의 라듐을 선물했다. 그 후 1929년에도 미국은 다시 1g의 라듐을 그녀에게 보내왔는데, 그것은 바르샤바의 연구소(1차 대전 후 마리가 세운 연구소)에 대한 선물이었다. 원래 라듐의 제조법은 퀴리 부부가 발명한 것이므로 만약 특허출원을 했다면 백만장자라도 되었겠지만 마리는 라듐의 특허 신청을 하지 않았다. "원소의 일종인 라듐은 전 인류의 것이므로 누구도 그것을 상업적으로 이용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 마리의 확고한 신조였다. 그래서 마리 자신은 1g의 라듐도 다른 곳에서 얻어야 하는 형편이었다. 마리 퀴리는 이렇듯 오랜 연구생활 동안 라듐의 방사선을 계속 쪼인 결과 악성빈혈을 일으키게 되고, 1934년 7월 4일 67세를 일기로 산세르모스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인류의 복지와 과학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여성과학자로서 전 세계인들의 끊임없는 추앙과 사랑을 받고 있다.

퀴리 부인의 자녀들도 노벨화학상 수상(퀴리 부인의 자녀교육과 그 업적)
마리 퀴리의 자녀 교육 방법 중에 ‘품앗이 교육’이 유명하다. 마리는 이상적인 자녀교육을 위해 품앗이 교육을 기획하고 자신이 재직 중이던 프랑스 소르본대학의 교수들을 초청하여 과학, 문학, 역사 등 분야 별로 자녀들을 위한 품앗이 교육 팀을 구성했다. 큰 딸 이렌을 포함하여 10명 안팎의 아이들을 세계적인 석학들이 직접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마리 퀴리와 동료 교수들은 교과 지식은 물론이요 다양한 교습 방법과 폭 넓고 심오한 지식들을 그들의 자녀들 교육에 아낌없이 제공했으며, 이렇게 훌륭한 교육을 받고 자란 그들의 자녀들은 장차 훌륭한 학자들로 성장할 수 있었다.


○ 노벨화학상을 수상한 장녀 이렌 졸리오 퀴리(1897~1956) 부부
퀴리부부의 맏딸인 이렌은 원자물리학자이다. 이렌과 남편 프레데릭도 퀴리 부부의 연구열정을 어어 받아 일생을 과학과 세계평화를 위하

이렌과 남편 졸리오 퀴리

여 몸을 바쳤다. 프레데릭 졸리오 퀴리(Fredeeric Joliot Curie, 1900~ 1958)는 1900년 3월 19일 파리에서 작은 철물공장을 경영하는 앙리 졸리오의 7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923(23세)년에 파리의 물리화학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마리 퀴리의 라듐연구소의 조수가 되었는데, 라듐 연구소에는 마리의 장이렌과 남편 졸리오 퀴리ⓒWikipedia  녀 이렌이 조수로서 다년간 방사능 연구에 종사하고 있었다. 프레디릭은 곧 이렌과 서로 마음을 나누다가 1926년에 결혼에 골인하였다. 프레디릭은 당시 실험물리학자로서의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여, 아내 이렌과 공동으로 잇달아 논문을 발표하였는데, 1932년에는 중성자 발견의 직접적인 실마리가 된 중요한 현상을 발견하게 되었다. 1933년부터 2년 동안에 졸리오 퀴리 부부는 그때까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인공방사능의 현상을 발견하게 되고, 이 업적으로 1935년에 노벨화학상을 부부가 공동으로 수상했다.

졸리오 퀴리 부부의 새로운 발견으로 핵분열의 연쇄반응이 가능하다는 것이 알려지게 되었고, 전 세계 각처에서는 원자력 해방을 겨냥한 연구

가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 그즈음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독일 점령군과 싸우는 레지스탕스 운동에 프레디릭이 참가하게 되고,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프레데릭은 원자력청 장관에 임명되어, 프랑스의 원자로 제 1호기를 건설한 역사를 기록하게 되었다. 1948년 이래 프레데릭은 세계평화평의회 의장으로서 전 세계의 평화운동에 앞장서기도 했다. 이렌은 1956년 3월 16일(59세), 프레데릭은 1958년 8월 14일(58세) 세상을 떠났는데, 특이 하게도 맏딸 이렌은 어머니 마리 퀴리와 너무도 흡사한 삶을 살았다. 예를 들어, 어머니처럼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재원이었고, 대학 졸업 후 동료 과학자와 결혼했고, 부부가 공동으로 연구를 진행하여 노벨화학상을 수상하였으며, 방사능 실험 연구의 후유증으로 인한 백혈병으로 사망하게 된 것까지도 어머니 마리 퀴리와 너무도 흡사한 삶의 모습을 연출했다. 또한 이렌 퀴리는 과학의 역사

왼쪽 부터 마리퀴리, 아버지, 브로니 스와니, 헬레나

상 매우 중요한 발견을 두 번이나 놓쳐버린 안타까운 사실도 있어서 '노벨상을 두 번이나 놓친 불운의 여성 과학자‘로서도 널리 알려져 있다.


○ 차녀 이브의 남편은 노벨평화상(1904~2007), 이브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 수상
 유명한 피아노 연주자이고 저널리스트이면서 작가로도 활동한 이브 는 1926년 언니 이렌이 결혼한 후에는 어머니 곁에 남아 1934년  어머니

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곁에서 극진히 모셨다. 이브는 청년    기에 들면서 자신이 과학에 소질이 없음을 깨닫고, 과학의 길에서   멀리 벗어나 문학의 길로 들어선다. 이브는 1935년 어머니의 모국인  폴란드를 방문하여 어머니의 자취를 확인하고, 이를 바탕으로 1937 년 "퀴리부

인"(프랑스어: Madame Curie)을 출간하여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이 책은 1943년 미국 메트로 골드윈 메이어 영화사에  의하여 시나리오로 각색되기도 하였다. 이브 퀴리는 제2차 세계대 전 당시에는 리비아와 러시아, 버마, 중국 등지에서 전쟁 특파원   차녀 이브 퀴리 Wikipedia 으로 활약하였고, 샤를 드골이 주도한 대독(對獨) 프랑스 해방운동(FFL)에 적극 가담하기도 했다.

1944년부터 1949년까지 이브는 일간지 파리 프레스(Paris-Presse)의 부 발행인으로 활동하였으며, 북대서양 조약기구 사무총장 특별 보좌관, 아동구호 활동가 등으로도 활약하였다. 국제기구 활동 중에 만난 미국 외교관 헨리 리처드슨 라부이스 주니어(Henry Richardson Labouisse Jr.)와 1954년 11월에 결혼하고 1958년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였으며, 세상을 떠날 때까지 프랑스와 미국의 이중 국적을 유지하였다. 1965년 남편 헨리 라부이스 퀴리는 유니세프 대표로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다. 1987년 남편이 사망한 후, 이브는 뉴욕에 거주하면서 유니세프 활동에 열중했고, 2005년에는 유니세프 활동의 공로로 레지옹 도뇌르 훈장(나폴레옹 1세가 1802년에 제정한 가장 명예로운 프랑스 훈장)을 받았다. 2007년 10월 22일, 뉴욕 맨해튼의 서튼 플레이스 자택에서 향년 102세로 세상을 떠난 이브는 생전에 이런 말을 했다. “저는 우리 집안의 수치입니다. 아버지, 어머니, 언니, 형부, 남편 모두 노벨상을 수상했는데, 저만 타지 못 했거든요!” “남편은 노벨평화상을 수상했고, 언니 부부는 공동으로 노벨화학상을 수상했지요. 그리고 아버지는 노벨물리학상, 어머니는 노벨물리학상과 노벨화학상을 수상했거든요!!”

제 1회 솔베이회의에서 마리퀴리(오른쪽 밑 두번째 앉아있는 마리퀴리와 뒤줄 오른쪽 두번재 서 있는 아인슈타인)

노벨상 가족, 퀴리 가문의 빛나는 업적과 일대기
1903년 : 라듐 연구로, 마리 퀴리와 남편 피에르 퀴리가 노벨물리학상 공동 수상.
1907년 : 라듐 원자량의 정밀한 측정에 성공.  
1910년 : 금석 라듐의 분리.
1911년 : 라듐 및 폴로늄의 발견과 라듐의 성질 및 그 화합물 연구로, 마리가 노벨화학상 수상하고 그 공적으로 방사능 단위에 퀴리(curie)가, 화학원소 퀴륨에 이름이 그대  로 사용되었다.
1935년 : 장녀 졸리오 퀴리와 남편 프레데릭 졸리오 퀴리가 노벨화학상을 공동 수상. 그 업
         적은 중성자 발견의 직접적 실마리가 된 중요한 현상 발견과 인공방사능 현상의 발견이다.
1965년 : 이브의 남편 헨리 라부이스 퀴리는 유니세프 대표로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2005년 : 이브는 유니세프 활동의 공로로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받았고,
   내셔널 북 어워드(National Book Award) 논픽션부문상을 수상했다.

* 내셔널 북 어워드(National Book Award) : 영국에서 가장 권위가 있는 순수문학상으로 이브 퀴리가 2005년 수상
* 방사선(Radioactive rays) : 에너지가 높아 불안정한 원자, 또는 원자핵으로부터 방출되는 에너지의 흐름을 말하는데, 이 방사선의 에너지가 매우 높아 위험하기도 하지만, 잘 이용하면 X-ray, 방사선 암치료 등에 매우 유용하게 사용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방사선이 발견되고, 세상에 알려지기 까지는 한 가족의 엄청난 노력과 희생에 근거한바 퀴리 부인으로 잘 알려진 마리 퀴리와 그녀의 가족들 이야기이다.
* 베크렐선 (Becquerel線) : 우라늄에서 나오는 방사선으로 알파선, 베타선, 감마선 모두를 지칭. 1896     년에 프랑스의 물리학자 베크렐이 발견.

<참고문헌>                                 
1) Curie Is Dead : Obituary, New York Times, 5 July 1934 Mme. Martyr to Science Some places and memories related to Marie Curie
2) IUPAC, Chemistry International, Vol.33, No.1 (2011).
3) Marie Curie : Biography 노벨재단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마리 퀴리 전기.
4) N. Froman, "Marie and Pierre Curie and the Discovery of 문화 속의 과학 마리 퀴리의 노벨화학상 수상 100주년 회고
5) Polonium and Radium : http://www.nobelprize.org/nobel_prizes/physics/articles/curie/
6) 노벨상 홈페이지 : "The Nobel Prize in Chemistry 1911",
7) 마리 퀴리 : 네이버 캐스트, ‘오늘의 인물’
8) Marie Curie – Biography 노벨재단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마리 퀴리 전기, 1903년 노벨상 수상자
   Obituary, New York Times, 5 July 1934 Mme. Curie Is Dead; Martyr to Science, Some places and memories related to Marie Curie; Marie Curie on the 500 French Franc and 20000 old Polish zloty banknotes.
9) American Institute of Physics: 마리 퀴리의 삶에 관하여. AIP에서 마리 퀴리의 사진을 찾을 수 있음.
10) Marie Curie - 인터넷 영화 데이터베이스 - 마리 퀴리에 관한 전기 애니메이션, world and American history - Animated Hero Classics distributed by Nest Learning.
11) Marie Curie - More than Meets the Eye - 인터넷 영화 데이터베이스 - Live Action portrayal       of Marie Curie on DVD from the Inventors Series produced by Devine Entertainment.
12) Marie Curie-인터넷 영화 데이터베이스-BBC가 만든 텔레비전 시리즈 중의 한편 - 마리퀴리 전기

 

 

노벨사이언스  webmaster@scinews.kr

<저작권자 © 노벨사이언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노벨사이언스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