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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대복 잘 살기 기념관 이사장 겸 관장

■ 노벨사이언스 제2집 원로 문인에게 듣는다.


"부모에 대한 시를 쓰기 시작하다가 수필을 쓰게 되었고

내가 겪은 삶의 역경을 글로 남겨 독자들과 소통하고 싶었습니다"


구두닦이, 공장직공, 양철쟁이, 신문배달, 등 야간학교 다녀 

어려운 과정 거쳐 '잘살기 기념관' 세워 잘 살기 운동 펼쳐 

 

◇ 마대복  잘 살기 기념관 관장

◇ 대담 : 김 노 (소설가. 한중문화예술콘텐츠협회 이사)

지난 6월9일날 나들이하기에도 좋은 화창한 날씨에 서울 혜화역 근처에 위치한 <잘살기 기념관>을 취재차 방문했다. 입구로 들어서자 서울에서는 보기 드문 슬레이트지붕에 역사적으로 기록될만한 흑백사진들로 사면팔방에 붙여진 관계로 조금은 어수선해 보이는 공간에서 연락을 받으신 마대복관장님께서 취재일행인 우리에게 환한 미소로 반겼다. 그는 저녁에 있을 행사로 한창 바쁜 와중에도 귀한 시간을 내어 그간 <잘살기 기념관> 역사에 대해 깊은 얘기를 나눴다.

김노 : 마대복 관장님 이력사항에는 특별하게도 ‘구두닦이’부터 시작하여 많은 어려운 과정을 거쳐 잘살기 기념관을 세워 잘 살기 운동을 펼쳐 오고 계시는데 특별한 동기가 있습니까.

마대복 관장 : 우선 이렇게 <잘살기 기년관>을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6.25사변 직후에 정읍 옹동면의 상도산이라는 산 밑의 험한 산골동네에서 살았는데 너무나 가난해서 초등학교 5학년을 중퇴를 할 수밖에 없었고 그때부터 11살 나이에 동네 형들을 따라다니며 매일 같이 10리(4km) 거리에 있는 깊은 산에 올라가 나무를 해다 팔기도하고 주로는 숯을 받아다가 20리 길을 걸어 장에 내다파는 일을 했습니다. 어린나이에 나뭇짐이 너무 무거워 고된 육체노동을 잊기 위해 형들이 가르쳐준 대로 형들이 건넨 삼잎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스스로 만들어 몰래 피웠습니다. 삼 잎을 말아 피웠으니 지금으로 치면 대마초를 피웠던 것이지요. 그러다가 어느 날 어머니에게 들통이 났고 화가 난 어머니는 저를 방으로 끌고 들어가 대나무 뿌리로 된 회초리로 사정없이 저를 내려쳤습니다.  "어린 것이 벌써 담배를 배우다니. 어린 아들이지만 너에게 희망을 걸었는데…." 그러나 나는 용서를 빌기는커녕 어머니에게 막 대들었습니다. " 매일 나무나 하고 학교도 못 다니는데 희망은 무슨 희망이야?" 매를 때리던 어머니가 갑자기 동작을 멈추고 저를 와락 끌어안으시며 우셨습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그래 내가 굶어 죽어도 너를 학교에 꼭 보내 주마." 그길로 저는 3년간 피우던 대마초를 끊고 학교에 복학해 초등학교를 졸업하게 되었고 이모님의 도움으로 이리(지금의 익산)남성중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지요. 그러나 중2때 이모님께서 집을 잘못 사는 바람에 광주로 이사를 가버렸고 그 통에 수업료를 석달치 내지 못하자 학교에서 쫓겨났습니다. 가난의 굴레에서 헤어날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께서 학구열에 빠진 저를 위해 고민 끝에 함께 상경을 했고 을지로 5가 천막촌에 짐을 풀었습니다. 그때부터 어머니는 나물장사를 하셨고 저는 대한극장 주변에서 구두닦이를 시작으로 공장직공, 양철쟁이, 신문배달, 은단장사, 공사판노동, 심지어 창녀들을 상대로 만화가게 등 숱한 밑바닥 일을 전전하면서도 밤이면 야간학교로 달려갔습니다.

어머니의 헌신적인 사랑과 선생님의 가르침으로 유혹을 뿌리치며 나쁜 길로 빠지지 않고 한영고등학교야간부를 졸업할 수 있었고 경희대학교

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되돌아보면 지난날 야간학교를 세우고 잘살기 운동을 할 수 있었던 결정적 동기는 물론 어머니의 사랑도 있었지

만 고등학교 2학년 때 선생님으로부터 들은 덴마크의 교육 얘기였어요.

국어 수업 시간인데 갑자기 전깃불이 나갔어요. 야간학교라 수업을 할 수 없어 선생님께서 잠이 오는 학생은 자고 그렇지 않은 학생은 내 얘기를 들어라 하시면서 어둠 속에서 덴마크의 발전의 이유를 말씀해주셨습니다.  "달가스가 나무심기 운동을 했고,그룬트비가 정신개조운동을 부르짖으며 각 대학에 다니며 강의를 한 것은 모두 알고 있겠지? 지금 하는 얘기는 책에 안 나온 얘기야. 실은 덴마크 인재의 산실인 국민고등학교를 세운 사람은 달가스도 그룬트비도 아닌 크리스텐 콜이라는 19살 먹은 초등학교밖에 졸업하지 않은 청소년이란다. 그는 진실한 크리스찬이었는데 구두방을 하던 아버지의 창고를 헐어 20명의 학생들로 학교를 시작했고,결국 그 학교는 3000명 학교로 성장했단다."  국어선생님의 이야기는 피곤에 지쳐 엎드려 있던 어린 나의 가슴에 깊이 스며들었습니다. '나는 크리스텐 콜보다 5년이나 더 공부를 했는데 무엇을 하고 있나? 나는 초라한 구두닦이일 뿐인데... 하지만 나도 어려운 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사람이 될 수 있다. 내가 꿈과 희망을 주는 사람이 되자!' 교육의 중요성을 그때 깊이 깨달았습니다.

 

김노  : 그동안 잘 살기 운동을 펼쳐 많은 성과를 거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언제부터 시작했으며 주요성과를 말씀해 주시지요.

마 관장  : 1964년 군대를 제대한 후 나는 이듬해부터 고등학교 시절 크리스텐 콜 같은 사람이 되겠다는 꿈을 실천하기로 마음먹고 나처럼 불우한 청소년을 위해 배움의 장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1964년 5월 1일 서울 종로구 창신동 동창공민학교를 몇 번 찾아간 끝에 장소 사용을 허락받아 '잘살기 중학원'을 개원한 것이 그 첫 시작이었습니다. 가난하더라도 바르게 살면 그게 잘사는 것이라는 나의 확고한 신념에서 간판이름도 그렇게 지었습니다. 그리고 불우청소년들을 일일이 찾아 다녔습니다. 그때당시 산동네의 많은 불우청소년들의 부모들은 그날그날 막노동과 식모살이로 다 하루하루 벌어먹고 살기 바쁜 시절이어서 누구하나 자식들의 교육이 우선일수가 없었고 오로지 먹고 사는 일이 급급해 아이들조차 스스로 밥벌이를 해야 되는 상황이어서 학생 모집에도 애를 먹었습니다. 아무튼 20여명의 학생들을 어렵게 모아 수업을 하기 시작했고 불과 5개월 만에 공민학교가 폐교되는 바람에 꿈을 꺾을 수가 없어 창신동 골목 가로등 밑에서 수업을 계속 했습니다. 하지만 시끄럽다는 이유로 주민들로부터 쫓겨나 다시 창신동 산동네 고등학교 때 어머니와 함께 손수 흑벽돌을 찍어 지은 비좁은 집에서 불편한데로 앉고 문밖에 서서 수업을 이어나갔습니다. 장소도 문제지만 학생 모두가 너무나 가난했기 때문에 책과 노트도 다 사줘야 되는 형편이어서 나는 부득

이 다시 구두닦이를 시작해야 했습니다. 경희대 학생임에도 불구하고 그날도 나는 학교 본관에서 교복을 입은 채 구두닦이를 하다가 당시 조영식 총장 눈에 띄었고, 사연을 알게 된 조 총장께서 음대 학생들에게 자선음악회를 열게 하고 모금을 해 야학 운영에 도움을 주셨습니다.

그렇게 “잘살기 중학원”으로 시작해서 여러 뜻있는 분들의 도움으로 1965년 3월 이화동에 건물을 마련해 <대명중학>을 설립했습니다. 1975년에 강남구 일원동으로 자리를 옮겼고 1978년에 다시 거여동으로 옮긴 뒤 1987년도 2월을 마지막으로 폐교가 되었습니다. 22년동안 졸업학생들이 무려3600여명이나 되고 가난으로 정식학교를 다니지 못했지만 대학교수, 목사, 소설가 등 많은 인재를 배출하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에게 심어준 작은 씨앗들이 큰 열매를 맺어 사회 구석구석을 비추어 주는 모습들이 저의 보람이고 기쁨이지요.

 

김노 : 애로사항도 있을 것이고 아쉬운 점도 있을 것입니다.

마 관장  : 청소년! 이름만 불러도 희망이 솟습니다. 청소년 그 자체가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꿈이 없는 청소년은 이미 청소년이 아닙니다. 꿈은 생명입니다. 꿈을 세워놓고 마라톤선수처럼 꾸준히 달리다보면 언젠가는 골인지점에 도착해 있을 것입니다. 꿈을 생각하는 순간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어 질 수도 있습니다.

그동안 많은 제자들 가운데 끼니조차 어려워서 배가고파 결석을 한 경우도 있었고 범죄를 저질러서 파출소로부터 호출을 당한적도 있었습니다. 소년원으로 들어간 제자들도 있었고 가족을 대신해서 돈을 벌어야하기 때문에 학교에 나올 수 없는 학생도 많았습니다. 다 아픈 사연들이고 가슴 아팠지만 도저히 혼자만의 힘으로 능력으로는 다 포용할 수가 없어 많이 괴로워했습니다.

작년통계에 의하면 1년 교통사망수가 2천여 명이고 자살자 수가 6천명이 넘는다고 하니 자살자수가 세계 1위라고 합니다. 그중에서도 청소년 자살자수가 세계1위라니 경제대국이라고 큰소리 칠 수가 없습니다. 무엇보다 자랑스러운 대한민국국민이라고 말할 수가 없지요.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사는가?”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삶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고 행동하고 실천하는 오늘의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김노 : 마 관장님께서는 이화동에서 대단한 큰 꿈을 성취하셨습니다. 현재 문학원로로서 그리고 사회사업가 원로로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계십니다. 어렸을 때 장래 꿈이 무엇이었습니까.

마 관장  : 애초부터 작가가 되겠다는 생각은 없었고 오로지 학구열과 어머니의 사랑으로 나 같은 불우청소년들을 위해 교육자가 되는 게 꿈이었습니다. 그래서 학교를 설립했고 교육에 혼신을 다하고저 노력했습니다. 폐교후에도 정희여자상업고등학교 교감으로 취임했고 정희 여상고 교장으로 취임을 해서 거기서 정년퇴임을 했습니다. 어느 정도 꿈을 이루었다고 생각합니다.“얼마 전 10여 명의 노인들이 기념관을 찾아와서 자기들이 잘살기 학원 졸업생이라며, 선생님 덕분에 가난을 딛고 희망을 꿈꿀 수 있었다고 말해서 지난날 겪었던 고생들이 결코 헛되지 않았구나 보람되고 기뻤습니다.

 

김노 : 마 관장님께서는 시인이면서 수필가이신데요. 문단에 등단하신지 얼마나 되었습니까. 등단한 계기는 무엇인지요.

마 관장  : 문단에 데뷔한지는 약 15년정도 됐습니다. 부모에 대한 시를 쓰기 시작하다가 수필을 쓰게 되였고 내가 겪은 삶의 역경을 글로 남겨 독자들과 소통하고 싶었습니다. “아내의 휴가”를 썼을 때는 뜻하지 않게 주변에서 반응이 뜨거웠습니다. 미약하나마 글로써 누군가에게 위

로와 용기를 주고 싶습니다.

 

김노 : 대뷔 이후의 활동사항을 자세히 설명해 주십시오.

마대복 : 개인의 저서 5권외에도 수필집 공저: 아직도 못다한 이야기, 합창하는 세상, 나뭇잎 강물에 띄우고. 그리고 시집, 수필집 공저: 열린문학, 이후문학, 달구벌 수필, 글송아리, 종로문학, 한국문학, 문장, 대구문학, 상록수문학, 문학정신. 이 있습니다.

동인활동으로는 구로문인회 동인, 서울교원문인회 동인, 수원 문학동호회원, 대구남구도서관 시회원, 대구중앙도서관 수필회원, 달구벌 수필회원 등 입니다.

 

김노 : 특히 문학분야에서는 주로 어떤 소재로 시나 수필을 쓰십니까. 그리고 그 동안 책은 몇 권을 내셨는지요. 여러 작품 중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은 무엇이며 그 사연은 무엇입니까.

마 관장  : 주로 제가 그동안 겪은 삶을 소재로 글을 썼습니다.

수기문 “은총의 햇살이여”, 수필집 “삭발의 딸 아빠의 분노”, “사랑꽃 핀 발 자국”, “영호남 한마음 손에 손잡고”, 시집 “해와 달이 함께 산다” 등 총 5권 의 책을 냈는데 가장 애착이 가는 책은 그래도 첫 작품집인 “은총의 햇살” 수기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수기문 중에 ‘삭발의 모정’에 대한 글이 있습니다.

어느 날 저녁식사가 끝나자 어머니께서 눈물을 글썽이면서 ‘네가 사준 양은다라를 그만 잃어 버렸구나. 평생 두고 보면서 쓰려고 했는데 ...’ 말끝에 목이 메이셨어요. 그날도 시장어귀에서 나물장사를 하셨는데 낯선 20대 청년이 친절히 다가와 마치 어머니를 보는 기분에 안쓰럽다며 자신은 근처 교회 청년 회장이라고 소개하며 나물을 몽땅 팔아줄 뿐만 아니라 교회에 있는 밀가루 한포대도 그냥 드리겠다고 해서 의심 없이 양은다라를 건네줬다고 합니다. 그런데 분명히 교회로 들어가는 것을 지켜봤음에도 이제나저제나 한참을 기다려도 청년이 나오지를 않아 어머

니는 그때서야 불현 듯 의심이 들어 교회로 들어가 목사인 듯 싶은 분에게 자초지종을 얘기하니 ‘하필이면 교회를 팔아 노인네를 속이다니 사기를 당하신겁니다.’ 뒤늦게 뒷문이 있다는 걸 알게 된 거지요. 그 양은냄비는 내가 군복무시절 육군일병일 때 부대에서 있었던 반공웅변대회에서 1등을 해서 상금으로 탄 오천원으로 산 것입니다. 특별휴가까지 받아 집에 오던 날 어머니께서 그날도 새끼토막을 머리 한가득 이고 오셨고 연탄비를 아끼려고 늘 시장바닥에서 더럽고 먼지가 많은 새끼토막들을 줏어다 불을 때서 시장에 내다팔 나물을 삶았습니다. 나는 그런 어머니의 모습이 안쓰러워 그 돈으로 어머니 몰래 앞집 연탄가게에서 연탄을 배달시키고 부대로 돌아왔습니다. 어머니께서 뒤늦게 아시고 그 연탄을 되팔아서 아들의 사랑을 영원히 기념하시겠다면서 제일 큰 양은다라를 산 것인데 그걸 빼앗겼으니 상심이 말이 아니었지요. 이아들이 더 좋은 걸 사 드릴테니 잊어버리시고 어서 주무시라고 눕혀드렸습니다. 전과달리 머리 수건을 쓰고 계시길래 벗겨드리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머리카락이 없이 드러난 민둥머리가 볼썽사납게 여기저기 싹뚝싹뚝 잘려져 나가고 없었는데 돈과 바꾼것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저를 위해 어머니께서 한푼이라도 모아서 군제대후의 대학교 등록금을 준비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이 무엇인지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뼛속깊이 느낀 그날 나도 장차 훌륭한 사람이 되어 어머니처럼 사랑을 베푸는 인생을 살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김노 : 마 관장님, 자신이 어린 시절부터 매우 가난한 생활을 해오면서 오뚜기마냥 모든 고난을 극복해 오셨습니다. 어려운 생활환경의 청소년들에게 가장 힘이 될 수 있는 키 워드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마 관장 : 꿈을 키워주는 일입니다.

결국 포기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잘살기학원>도 돈을 많이 벌어서 출세하란 말이 아닙니다. 삶을 잘살라는 뜻이지요 제가 학생들에게 수업을 받기 전에 먼저 내가 만든 열가지 선서부터 낭독하게 합니다.

1,한마디의 약속을 생명처럼 귀중하게 생각하는 학생

2,의지가 돌같이 굳어 어떠한 어려움이라도 뚫고나가는 학생

3,작은일도 창의력을 발휘하여큰일과같이 충성스럽게 실천하는 학생

4,자기보다 남을 위하여 봉사하려는 마음이 불타는 학생

5,어떠한 곳에서든지 자기의 올바른 독특성을 잃지 않고 나타낼 수 있는 학생

6,겸손하고 깨끗한 마음을 가진 학생

7,아무리 낮고 천한 직업일지라도 떳떳이 일할 수 있는 학생

8,아는 것이 곧 힘임을 알고 ㅣ식을 쌓기에 온갖 노력을 다하는 학생

9,스승을 존경함 어른을 공경하고 손님을 친절히 맞아들이는 학생

10,모든일을 굳건한 신앙생활로써 이끌어나가는 학생

오늘날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 각계에 진출해 활동 할 수 있는 것은 잘살기 학교의 정신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안으로 들어오는 초등학생이나 중학생에겐 발표회를 열어줍니다. 시나 작문을 지으면 상장을 주고요. 초등학생은 중학교를 가는 게 꿈이 아니다. 중학생은 고등학교, 고등학생은 대학교, 대학생은 일반회사에 취직 하는게 결코 꿈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내가 세운 학교를 소개해줍니다.

꿈을 크게 가져야 잘 살 수 있다고 말해줍니다.

 

김노 : 우리나라에도 훌륭한 문인들이 많고 작품도 많습니다. 그러나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아직 탄생하지 못했습니다. 원로 문인으로써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마 관장  : 어려서부터 글을 쓰는 사람은 가난하게 산다는 부모(어른)들의 고정관념과 사회의 인식으로 자녀들의 재능을 살려주기는커녕 기를 꺾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학교수업이 재능보다는 상급학교 학력위주의 교육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문학예술 등 재능이 있다하더라

도 꿈을 키워나가기보다 중도에 포기하는 경우가 많지요.

게다가 대학시절부터 뛰어난 재능이 인정되더라도 경제적 뒷받침이 없다면 대중문학에 뛰어들게 되고 세계적인 문학 경지에 뒤처지는 건 당연하다고 봅니다. 또한 작가 분들이 스스로 외국어로 글을 써서 세계문단에 내놓을 만한 실력이 부족한 점도 한 원인이고 무엇보다 전문적으로 우리문학을 번역하여 세계에 소개하고 내놓을만한 번역 작가 전문 인력 양성이 부족하다고 봅니다. 노벨상의 모든 분야에 도전할 수 있는 정부의 지원과 기업가들의 후원 또한 마찬가지로 부족하다고 생각됩니다.

아닌말로 정부지원은커녕 유능한 작가라 할지라도 정부의 입맛에 따라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오히려 작가들을 분노케 하는 풍토속에서는 좋은 결과를 가져 올수 없겠지요.

 

김노 : 노벨상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권위 있는 문학분야의 상을 수상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지원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마 관장 : 세계적인 문학 분야에 어떤 상이 있는지 알리고 문학의 독특성, 작가의 정신, 문학의 변천 흐름을 면밀히 분석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이러한 작업을 위해서는 작가자신의 노력도 중요하겠지만 전문적인 말하자면 노벨사이언스 같은 잡지, 평론가 규모가 큰 국내수상자배출 등 종합적인 대책을 세워 집중적으로 꾸준한 지원과 관심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김노 : 앞으로 활동계획을 말씀해 주시고 우리 사회에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이 기회를 통해 말씀해주십시오.

마 관장  : 경제성장과 함께 더 이상 야학의 필요성이 없어진 게 원인이 되어 폐교가 되었지만 3천600명의 졸업생과 당시의 힘들었던 순간을 함께 기억하고, 우리 아이들에게 60년대 근대화 시기 어려웠던 교육 환경을 보여주고 알리고 싶어서 이 기념관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몇 년간 소년감별사 활동과 더불어 소년원들에게 올바른 길을 가도록 특별강사로 5년을 활동했습니다만. 앞으로도 나의 삶을 통해 깨닫고 배운 지식들을 불우 청소년들에게 전수하고 잘 사는 삶을 위해 큰 꿈을 심어주는 일을 계속 할 것입니다.

요즘에 인구절벽이란 말이 나오고 있는데 그러잖아도 결혼연령대가 늦어지는 마당에 직장구하기가 쉽지 않으니 젊은이들이 연애는 하되 결혼은 포기한다고 합니다. 너도나도 자식을 안 낳으면 우리의 미래가 초노인국가로 되는 것은 시간문제지요.

남북이 갈린 지 70년이란 세월이 흐르는 가운데 주먹으로 싸우고 총으로 싸우고 대포로 싸우다 수십만 명이 죽고 수백만 명이 고통을 당하고 이제 그것도 모자라 핵으로 전쟁의 공포 속에 살고 있는 지금 핵폭탄보다 더 무서운 게 인구부족입니다. 전국적으로 초등학생이 줄어들어 초등학교가 40%가 없어졌다는 통계가 나왔어요. 청소년들은 미래로 가는 원동력입니다.

 

김노 : 인터뷰 내용에 들어갈 시 한편 소개해 주십시오.

마 관장 :

           뭘 남기고 가려는가

                                

그대의  발자국을 한 번쯤 뒤돌아 보았는가

비뚤어진 발자국은 아니었는지

얼마나 똑바로 걸어왔는지

양심의 자로 재어 보았는가

 

그대의 얼굴을 한번쯤 거울에 비춰 보았는가

깨진 거울에 비춰진 찌그러진 얼굴은 아니었는지

진흙탕 속에 비춰진 검은 얼굴은 아니었는지

 

그대의 마음을 세 살 된 손자의 가슴에 마주쳐 보았는가

콩닥콩닥 뛰는 손자의 가슴에 얼굴을 묻어 보았는가

검은 심장이 부끄러워 유리알 같은 손자의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눈으로 눈물을 흘려 보았는가

 

뭘 남기고 가려는가

자식 놈, 몇 남겨 두었다고 자랑 하려는가

집 몇 칸, 돈 몇 푼, 남겼다고 으시댈 건가

세상 명예 얻었다고 떳떳하게 말 할 건가

 

불같은 세월, 그 너털웃음 남겨둔 채

상두산 끝자락에 내 이름 석 자 뿌려 지는 것을

검정 고무신에 피라미 몇 마리 잡았던 앞 냇가

그 흘러가는 물에 한 줌의 재가 되어 뿌려 지는 것을.

 

<잘살기기념관>은 비록 외관은 허름해 보이지만 서울 종로구 이화벽화 마을속에 당당히 하나의 명물로 자리하고 있다. 오늘도 마대복선생님께서 이곳을 찾아오는 모든 청소년들을 위해 꿈을 키워주는 희망 메시지와 어머니의 사랑을 알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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