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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최대의 과학 공헌자 - 알베르트 슈바이처
  • 김현숙 한국노벨과학연구원 부원장
  • 승인 2017.09.08 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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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5대 노벨평화상 수상

위대한 성자 알베르트 슈바이처

Albert Schweitzer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프랑스의 소도시 알자스의 카이제르스부르크에서 1875년, 루터교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고 성장 하면서 다양한 재능을 키워 철학자, 신학자, 음악가, 의사로서의 폭넓은 활동과 업적을 남겼다. 특히 인류의 형제애의 전 파자로서 1913년 아프리카로 건너가 원주민들의 의료와 전도에 헌신함으로써, ‘밀림의 성자’로서의 박애 활동이 시작되 었다. 슈바이처는 적도 아프리카의 랑바레네에서 알베르트 슈바이처 병원을 세우고 ‘생명에 대한 경외'라는 인류애가 바 탕이 된 자신의 철학 이념을 온전히 담아내는 삶을 통해서 인류의 형제애를 실천했다는 공로로 1952년 노벨평화상을 수 상하였다. 또한 음악가로서도 천부적인 재질을 지녔던 슈바이처는 독일 작곡가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를 연구했으며, 20 세기 초의 오르간 개선운동(Orgelbewegung)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철학박사, 신학박사, 의학박사 등 3개의 박 사학위를 취득하였고 인류애를 담은 저서 <물과 원시림 사이에서(회고록, 1921)>, <문화 철학>(Kulturphilosophie, 1923 년), <나의 생애와 사상(자서전, 1931년)>, <사도 바울로의 신비>, <현세계의 평화문제>, <바흐의 오르간 작품> 등 다수의 저서를 남겼다.

김현숙 한국노벨과학문화연구원 부원장

 

유년 시절의 슈바이처

알베르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는 1875년 1월 14일, 알 자스의 카이제르스부르크에서 루터교 목사인 루이 슈바이처 목사 의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형제로는 누나 루이제와 2명 의 여동생, 그리고 1명의 남동생이 있었다. 슈바이처가 태어날 당 시 알자스는 독일 영토였으나, 독일이 프랑스와의 영토 싸움에서 패하게 되어 제 1차 세계대전 이후인 1919년, 알자스가 프랑스령 으로 넘어가게 되어 슈바이처도 국적이 독일에서 프랑스로 바뀌었 다. 

슈바이처의 어린 시절은 몸이 허약한 편이었으나, 음악성이 풍 부하여 피아노 연주에 대한 재능을 보였고, 귄스바흐 교회의 파이 프오르간을 연주하기도 했다. 유년시절의 카이제르스부르크에서, 슈바이처는 성서에 대한 궁금증이 생길 때마다 루터교회 목사인 아버지에게 질문을 던졌고 아버지로부터 자상한 설명을 듣게 되어 기독교 신앙심을 키우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그가 소속된 교회의 교우들은 주변의 가난한 농부들이었기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가난한 사람들의 애환을 피 부로 느끼면서 마음속에 박애심이 길러졌다. 1931년에 출간한 자 서전, <나의 생애와 사상>에서 슈바이처는 가난한 친구들을 보면 서 자연스럽게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깊어지고, 성찬예배 를 진행하는 동안 목회자인 아버지로부터 아프리카인들의 비참한 삶에 대해 알게 되면서 깊이 마음에 새기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이러한 성장 환경이 훗날 슈바이처에게 박애심을 가진 진보적인 신학자이자, ‘밀림의 성자‘가 되도록 하는 자극제가 된 것이다. 슈바이처는 1884년까지 마을 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1885년이 되어서야 라틴어를 가르치지 않는 뮌스터 실업중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따라서 라틴어는 개인지도를 받으면서 고등학교 진학 준비를 해야 했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 뮐하우젠 고등학교에 입학 했으나, 대식구를 거느린 개신교 목사였던 부친의 박봉으로는 생 활 유지가 넉넉하지 못했기 때문에 작은 할아버지(루트비히 슈바 이처, 조부의 이복형제)댁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다. 자식이 없어 쓸 쓸해하던 작은 할아버지의 엄격하면서도 자상한 가정교육 속에서 성장한 슈바이처에게는 이 시기의 성장 환경도 훗날 인간애를 펼 치는 박애자로서의 소양을 다지는 데 한몫을 했다. 

뮐하우젠 고등 학교 시절의 슈바이처의 성적은 좋은 편이 아니었는 데, 이유는 라 틴어 기초가 부족했던 게 원인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상급반이 되었을 때 그가 존경하는 베만 선생님이 공부방법을 가르쳐줌으로 서 그의 성적은 좋아지게 되었고 베만 선생님의 교수 방법에 슈바 이처는 감동을 받으면서 그런대로 만족스러운 학교생활을 마칠 수 있었다.

청년시절의 슈바이처

청년기로 접어들자 슈바이처는 19세 이상의 독일 국민에게 부 여된 군복무를 위해 군 입대를 하였으며, 다행히 소속 중대장의 배 려로 군인 신분이면서도 대학교 공부도 겸 할 수가 있었다. 군 복 무 중 성령강림주일 휴가를 받아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보내게 되 었는 데, 당시의 어려운 사회상황에서 자신의 행복한 휴가를 잠시 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이렇게 가족들과 행복하게 휴가를 보내는 데, 이러한 행복을 나만 누려도 되는가?”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 었다. 유년시절에 가슴에 심어졌던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에 대 한 관심이 이렇듯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박애심으로 성숙되었던 것이다. 파리 유학시절에는 유명한 오르간 연주자인 찰스 마리 위도에게 오르간 연주의 지도를 받았고, 1892년부터는 파이프오르간 연주 가로서도 명성을 날렸으며, 또한 파이프 오르간 구조에 대한 논문 도 집필했다. 

그에게는 대학생 시절부터 간직해 온 꿈이 있었다. “30세까지는 학문과 예술을 위해 살고, 그 이후부터는 인류에 봉사하는 삶을 살 겠다”는 성스러운 목표였다. 1893년 10월, 슈바이처는 유럽에서도 가장 유서 깊은 프랑스 최대의 대학 중의 하나인 스트라스부르 대학교에 입학했는 데, 독일의 재상이며 대 문호였던 괴테도 한때 이 대학에서 수학했었다. 슈바이처는 대학 생활에서 혼신의 열의를 다해 공부에 매진했으며, 신학과 철학을 전공했다. 

그 결과 1899 년에 철학박사학위를 취득하였고, 1900년에는 신학박사학위를 취 득하였다. 이 와중에도 파이프 오르간 연주에도 꾸준히 관심을 가 졌으며, 대학 졸업 후에는 성 니콜라이 교회의 부목사가 되어 목회 활동을 시작했다. 목회활동 중에도 틈틈이 신학을 연구하여 <예수 전기>란 책을 출판했으며, 1902년에는 스트라스부르 대학의 강사 가 되었다. 신학자로서는 종말론적 요소를 주장하고, 철학가로서는 칸드철 학을 연구하였으며, 독자의 윤리관인 ‘생명의 경외’와 ‘예수전(傳) 연구사’를 1905년 발표하였다. 

그리고 아프리카에서의 의료봉사 생활을 하기 위해 의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스트라스부르 의과대 학에 진학하여 의학공부를 시작했다. 박애를 실천하기 위한 의학 공부 중에도 다양한 재능에 대한 소양 쌓기도 게을리 하지 않았으 며, 1906년에는 <독일과 프랑스의 오르간 제작법과 오르간 음악> 을 발표했으며, 풍압으로 인한 오르간 음색의 손상을 방지하기 위 해 근대 오르간의 간소화를 제시하였다. 또한 1911년부터 그의 아 내와 함께 편집한 <바흐 오르간 작품; Bachs Orgelwerke>도 출판 하였다.

위대한 성자의 박애의 삶

슈바이처는 대학생 시절부터 꿈으로 간직해 왔던 박애정신을 실 현하기 위해 30세 되던 1905년, 스트라스부르 의과대학에 들어가 의학공부를 시작했다. 교수이면서 목사이고, 의과대학 학생신분이라는 1인 3역의 열공의 시간을 착실히 쌓아나갔으며, 37세 때인 1912년에는 그가 교수로 재직하 는 대학의 교수 딸(헬레네 브레슬라우)과 결혼을 하고, 드디어 의학공부를 시작한 지 8년 만인 1913년에 의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다음 해인 38세 되던 1914년에 는 그를 돕기 위해 간호사 훈련을 받은 그의 아내 헬레네 브레슬라우와 함께 아프 리카에서의 의료봉사 사업에 평생을 바치기 위해 모든 직책에서 물러난 후 프랑스 령인 적도 아프리카의 랑바레네(Lambaréné; 가봉국의 무아앵오고웨주의 주도)로 떠

났다. 그곳에서 오고우에 강둑 위에 원주민들의 도움으로 병원을 세웠다. 처음에 는 자신의 자금과 수입으로 모든 기구를 갖추고 병원을 운영하였으나, 점차 여러 나라의 독지가나 재단들의 기부금으로 충당을 해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이렇듯 수 많은 환자들을 헌신적으로 보살핀 의료활동에 감동하여 당시 원주민들은 슈바이처 를 ‘오강가’(마법사)로 부르고 존경했다. 

1917년,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되고 독일 영토였던 알자스 지방 출신인 슈바이처는 독일인이라는 이유로 아내와 함께 프랑스군의 전쟁포로가 되어 프랑스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고향인 알자 스 지방으로 송환되었다. 같은 해에 그의 어머니가 프랑스 병사들의 말에 깔려 세 상을 떠나는 비극을 겪게 되었으나, 수용소에서의 고난과 어머니의 불의의 사고에 도 불구하고 의료 봉사에 대한 그의 열정은 꺾이지 않았다. 그는 스트라스부르 민 간병원에서 의사로 근무하는 동안에 유럽 전역을 여행하면서 연주회도 개최하고, 철학·신학의 강연 등도 하면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이 시기 에 아프리카 생활을 회상하며 출간한 저서 <물과 원시림 사이에서 > (Zwischen Wasser und Urwald, 1921)를 출판하게 되어 아프리 카로 돌아가기 위한 자금에 보탬이 됐다. 이러한 헌신적인 의료활 동은 물론이고 신학자로서의 선교활동, 음악에 대한 열정, 저술활 동 등을 통해 그는 점차 전 세계적인 문제들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 고 <문화 철학>(Kulturphilosophie, 1923)을 출간하면서, '생명에 대 한 경외'라는 자신의 철학을 그대로 온전히 담아냈다. 생명 존중에 대한 그의 철학은 살아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윤리원칙으로서, 그 는 이 원칙이 문명의 존속에 가장 중요하다고 믿고 있었다. 

이렇게 의욕적인 활동 중에도 의료봉사에 대한 그의 철학은 여전히 변함 이 없었다. 그 동안 중단했던 아프리카에서의 의료봉사 활동을 재 개하기 위해 1924년, 7년 만에 다시 아프리카의 랑바레네로 돌아 가 오고우에 강 상류 약 3.2㎞ 지점에 큰 병원을 세웠다. 그 뒤 그 곳에 한센병 환자들의 거주지도 추가로 마련했고, 정신장애인들 을 위한 의료시설도 만들었다. 그리하여 1936년경에는 이 병원이 350명의 환자와 환자 가족들이 머무를 수 있을 만큼의 규모로 발 전했고, 한센병 환자 거주지에는 150명의 한센병 환자들이 생활터 전을 가꿀 수 있게 되었다. 이즈음 병원의 인력 규모는 약 36명의 백인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다수의 원주민 근로자들이 환자들을 보살필 정도로 튼튼했다. 

이렇게 봉사의 시간들이 쌓여가면서 슈 바이처는 ‘세계의 위인’, ‘인도(人道)의 전사’, ‘원시림의 성자’ 등으 로 불리며 세상 사람들의 많은 존경을 받았다. 또한 신학자로서의 본분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음악가로서는 파이프오르간 전문가 로서의 활동도 꾸준히 이어갔다. 1928년, 슈

바이처는 괴테상(賞)을 수상했다. 괴테상은 독일의 마인강 연안에 있는 프랑크푸르트시가 그 도시 출신인 독일 최대 시인 괴테를 기념하여 창설한 문화상으로, 괴테가 여러 분야에 걸 쳐 활동했던 것에 비견할 만한 다양한 창작활동을 한 사람들에게 수여하는 상이다. 괴테상을 수상한 유명인들로는 1927년에 S.A.게 오르게가 최초의 수상자이고, 

1928년에는 슈바이처, 그 밖에도 프 로이트, 헤르만 헤세, T.만 등도 괴테상의 수상자들이다. 다양한 활 동으로 인류애를 실천한 슈바이처는 당연히 괴테상의 수상 대상자 가 되었다. 1939년, 제 2차 세계대전 중에도 유럽으로 돌아가지 않고 그 는 아프리카에서 전도와 진료에 전념하였다. 세월이 흘러 1951 년, 아카데미프랑세즈의 회원으로 선출되었고, 1952년에는 인류 의 형제애를 발전시키는 데 기여한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 는 데, 그는 노벨상의 상금을 나환자촌(癩患者村)을 추가로 건설하 는 데에 사용했다. 

1960년에 프랑스령 적도 아프리카가 독립하여 가봉공화국이 되었으나 흑인들의 그에 대한 경외(敬畏)감은 변함 이 없어서 새로 창설된 도성십자훈장(赤道 星十字勳章)으로 감사 의 뜻을 표하였다. 뿐만 아니라 같은 해에 영국의 명예 메리트 훈 장(honorary OM)을 수훈하는 영광도 찾아왔다. 이 훈장은 1983년, 캘커타의 성녀 테레사 수녀도 수훈을 한 훈장이다. 이렇게 평생을 가난한 사람들, 병든자들의 구세주로서의 삶을 이어간 슈바이처도 세월은 거스를 수가 없었던지 90세의 생일 이후로 건강이 급속하 게 악화되어 1965년 9월 4일 그가 평생을 사

 

랑으로 헌신한 아프 리카 랑바레네에서 전 세계인의 애도 속에 세상을 떠났다. 사실 슈 바이처는 아내 헬레네 브레슬라우가 세상을 떠난(1957년, 82세) 이후, 평생 동안 유럽 땅을 밟지 않았고 아프리카에 머물렀으며, 본 인이 세상을 떠난 후에는 그의 부인과 함께 그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병원 옆에 묻혔다.

성자 알베르트 슈바이처의 ‘생명 경외 사상’과 ‘거룩한 발자취’

슈바이처는 신학자로서는 종말론적 요소를 신봉하였고, 철학가로서 는 칸트철학을, 그리고 뛰어난 파이프오르간 연주가로서 오르간 개량에 도 큰 업적을 남겼다. 1906년, ‘독일과 프랑스의 오르간 제작법과 오르간 음악’을 발표하고 과도한 풍압(風壓)으로 인해 오르간의 음색이 손상되 던 폐해를 없애고자 근대 오르간의 간소화를 꾀하기도 하였다. 또한 슈바 이처는 모든 생명은 거룩하며, 희생되어도 되는 생명은 없다는 기독교 사 상인 ‘생명에 대한 경외(畏敬)’를 저서 <나의 삶과 사상>에서 주창하였다. 슈바이처는 모든 생명은 살아갈 권리를 가지고 태어나므로 소중히 여겨 야 한다는 철학을 평생 동안 주창한 위대한 성자였다.

거룩한 성자 슈바이처의 발자취를 정리해 본다.

1875년 : 1월 14일 프랑스 알자스 카이저스베르크에서 출생.

1894년 : 스트라스부르 대학교에 입학하 여 신학과 철학을 전공.

1899년 : 철학박사학위 취득.

1900년 : 신학박사학위 취득.

1905년 : 의과대학 진학, <음악가·시인 요한 세바스티 안 바흐> 발표.

1912년 : 아내 헬레네 브레슬라우와 결혼.

1913년 : 의학박사학위를 취득.

1914년 : 아내와 함께 프랑스령 적도 아프리카(현 가봉 공화국)의 랑바레네에서 의료봉사 시작.

1917년 : 제 1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 포로수용소에 수 감되었다가 고향인 알자스 지방으로 송환.

1921년 : <물과 원시림 사이에서> 출판.

1924년 : 아프리카 랑바레네로 돌아가서 의료봉사 재개.

1928년 : 괴테상 수상.

1952년 : 노벨평화상 수상. 1957년 : 아내 헬렌 브레슬라우의 사망(82세).

1960년 : 영국의 명예 메리트 훈장(honorary OM) 수훈. (캘커타의 성녀 테레사도 1983년, 수훈)

1965년 : 아프리카 랑바레네에서 9월 4일, 성자 알베르 트 슈바이처 별세.

[참고문헌]

1. 노벨사이언스 저널, 2017.

2. 슈바이처 전집 전5권 : 알베르트 슈바이처 저, 지명관 외 역, 청화, 1984.

3. 물과 원시림 사이에서 : 알베르트 슈바이처 저, 배명자 역, 21세기북스, 2009.

4. 나의 어린 시절 : 알베르트 슈바이처 저, 권혁준 역, 정원, 2006.

5. 나의 생애와 사상 : 알베르트 슈바이처 저, 천병희 역, 문예출판사, 1999.

6. 생명의 경외 : 알베르트 슈바이처 저, 크리스찬저널, 종로출판, 1994

 

필자 김현숙 약력

신성대학교 교수(전), 고려대학교 대학원 이학박사(Ph.D.)

시니어과학기술인협회(KASSE) 정회원

한국노벨과학문화연구원(KONSCA) 부원장

정보통신산업진흥원 한국정보화진흥원 평가위원

한국게임학회 게임산업 육성정책 분과위원장 역임

한국어정보학회 IT용어표준화 분과위원장 역임

한국정보과학회 전산교육연구회 부위원장 역임

남북IT용어표준화 심의위원(남측) 역임 (정통부) 대학 평가위원 역임

충남도청 정책자문교수 (기획 정보 분과위원) 역임

 

저서 및 사전 연구 편찬

(IT용어사전 6권, 대학교재 17권)

(사전 6권) IT용어대사전, IT용어큰사전, PC용어사전 외 3권

(대학교재 17권) 인공지능, 신경망컴퓨터, 정보통신개론, 전산학개론, 운영체제 외 12권

김현숙 한국노벨과학연구원 부원장  webmaster@sc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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